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엔니오 모리코네 (문단 편집) === 이력 === [[1928년]] [[11월 10일]] [[이탈리아]] [[로마]] 중심부의 [[http://stubbyplanner.com/exp/index_exp.asp?expserial=751|트라스테베레]]에서 태어났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태어나던 날은 이탈리아가 [[파시스트]] [[이탈리아 파시즘|정권 통치하]]에 들어가던 날이었다고 한다. [[나이트 클럽]]과 댄스 클럽 등지에서 활동하던 프로페셔널 [[트럼펫]] 연주자였던 아버지 로베르토 모리코네 덕분에 어릴 적부터 트럼펫과 음악 이론을 배울 수 있었다. 어머니 리베라 모리코네는 소규모 가내직물업을 하며 엔니오 외에도 프랑코, 아드리아나, 마리아, 알도의 5남매를 키웠다. 여섯 살에 처음 곡을 쓰기 시작하고 아홉 살에 이미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에서 개인적으로 트럼펫 레슨을 받을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아버지의 연주가 집안 전체의 유일한 수입원이어서 아프거나 하시면 종종 어린 엔니오가 대신 나가서 클럽 연주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열네 살에는 공식적으로 같은 음악원에 등록해 일종의 예비 과정인 하모니 프로그램과 트럼펫 전공 본과정을 차례로 이수했다. 이 기간 동안 트럼펫 외에 작곡과 지휘도 같이 배웠고, 특히 작곡 지도 교수였던 전위파 성향의 작곡가이자 20세기 [[현대음악]]의 위대한 거장인 [[https://en.wikipedia.org/wiki/Goffredo_Petrassi|고프레도 페트라시(Goffredo Petrassi)]]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한창 예민한 10대 시절, [[제2차 세계대전]] 을 겪고 비무장 도시인 로마에 독일 폭격기들의 무차별 폭격으로 인해 극심한 굶주림과 전쟁의 참상을 겪으며 힘들게 생활해야 했다. 이때 어린 모리코네가 겪은 처절한 고통과 생생한 경험은 평생 그의 기억에 남아 이후 영화 음악가로서 작곡한 작품들에도 크게 반영되었다고 한다. 당시 작은 악단에 소속되어 있던 모리코네는 [[나치독일군|독일군]]이 로마를 점령했을 때는 독일군들 앞에서 트럼펫을 연주하고, 2차대전에 승리한 [[미군]]이 로마에 입성했을 때는 미군들 앞에서 트럼펫 연주를 하였다고 한다. 1946년에 트럼펫 연주 [[전공]]으로 [[학위]]를 따서 음악원을 졸업했다. 하지만 작곡을 제대로 깊이 있게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모리코네는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작곡과에 재입학해 페트라시 교수의 지도 하에 공부를 계속 이어 나갔다. 이 당시 클래식 음악계는 극히 보수적이어서 연주자가 작곡을 배우고 싶어한다는 것은 거의 [[스캔들]]에 가까웠는데, 생계를 위해 밤에는 틈틈이 트럼펫으로 [[클럽]] 연주를 하면서 이 기간 동안 가곡을 비롯한 소위 '순수음악'에 속하는 곡들을 작곡하였다. 1954년에 작곡 학위를 획득해서 두 번째로 음악원을 졸업했다. 졸업 이듬해인 1955년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했지만 이상 높은 젊은 예술가에게도 현실은 현실인지라 경제 사정이 그리 녹록지가 않았다고 한다. 1956년에 마리아 트라비아(Maria Travia)와 결혼했으며 그 해 첫 번째 아들인 마르코를 얻었다. 부양해야 할 사랑하는 가족이 생기자 그는 더 이상 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학교를 나와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때는 [[대중음악]]의 전통을 벗어난 작곡을 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다음 몇 년 동안 자신이 추구해온 예술음악, 혹은 절대음악의 정의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에 있던 당시 유명 음반사인 [[RCA]]의 문을 두드렸고 그 곳에서 본격적으로 대중음악 가수들의 편곡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처음 활동하기 시작한 시절에는 몇 년간 유명 작/편곡가들의 작업을 하며 생계를 해결하고 경험을 쌓았다. 그는 스승 페트라시 및 같이 공부한 학구적인 동료 작곡가들의 비난이나 그들과의 논란을 피하기 위해 [[본명]]을 쓰지 않고 한동안 이런 저런 [[가명]]을 썼다. 모리코네의 회고 인터뷰 에 따르면, 당시 로마에서 유명 작곡가들이 간단한 스케치를 해서 던져주면 이를 확장해 오케스트레이션을 하거나 노래 반주를 만드는 [[편곡]] 작업을 하는 젊은 도제들을 "[[니그로]](negro)"라고 불렀다고 한다.(...) 모리코네는 동시에 이탈리아 [[국영방송]]국([[RAI]])의 [[관현악단]]에서 트럼펫 연주자와 작/편곡가로 활동하면서 당시 유명 팝 가수였던 [[폴 앵카]]의 편곡 작업을 하는 등 대중음악 분야의 경험도 많이 쌓았고 1950년대와 60년대를 통틀어 수백 곡의 노래들을 편곡했다. 모리코네는 이 당시 클래식에 아직 미련이 남아 있어, 1960년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베네치아]]의 라페니체 극장에서 자신이 작곡한 [[협주곡]] 지휘를 하며 클래식 음악계에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기왕 대중음악을 할거면 음반 제작과 히트곡을 만드는 과정에 핵심 역할을 함에도 음악 업계 관행으로 인해 늘 그늘에 가려진 편곡가보다는 이름 있는 작곡가로 더 알려지고 싶어했다. 그런 연유로 가명을 쓰기도 하며 주위에 자신의 편곡가 활동을 비밀로 하기도 하였으나, 곧 수많은 히트곡을 내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훌륭한 편곡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대중음악 작업을 하면서도 순수음악에 대한 흥미도 잃지 않아, 당시 이탈리아 전위음악의 선두 주자 중 한 사람이었던 프랑코 에반젤리스티가 주축이 되어 1964년에 결성한 '새로운 어울림음의 즉흥연주 그룹(Gruppo di Improvvisazione di Nuova Consonanza)'이라는 연주단의 일원으로도 활동하며 당시 영화음악 분야의 상업성이나 통속성과는 판이하게 다른 현대음악가로서의 진지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본격 장편영화의 음악 작업은 루치아노 살체의 파시스트(The Fascist (Il federale))의 음악을 작곡한 1961년부터 시작했다. [[https://youtu.be/Tj6MWE4wZx4|Ennio Morricone -- BBC2 Documentary]] - 1995년에 [[BBC2]]에서 방영한 엔니오 모리코네 [[다큐멘터리]]. 그의 생애와 음악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그와 함께 작업한 [[브라이언 드 팔마]] 등 유명 영화인들이 그의 천부적인 감각과 끊임없는 열정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영자막, 39분) [[https://youtu.be/prfCk2Y6kX0|Ogni Volta - Paul Anka 1964]] - 1965년 엔니오 모리코네가 편곡한 곡들 중 가장 높은 순위로 차트에 오른 [[캐나다]] 출신의 팝 가수 [[폴 앵카]]의 "Ogni Volta (Every time)". 폴 앵카의 전기에 의하면 이 곡이 담긴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etal04&logNo=50108205208&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45회전 싱글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300만 장 이상 팔렸다고 한다. [[https://youtu.be/x6fpSiE953w|Mina - Se telefonando]] 1966년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 및 편곡으로 참여한 이탈리아 가수 미나(Mina)의 "Se telefonando (If calling)". 언뜻 평범한 60년대 [[팝송]] 같지만 후렴부를 자세히 들어보면 3개의 음으로 구성된 멜로디 구조가 한 싸이클을 돌 때마다 한 음씩 추가되며 전조되는 모리코네의 탁월한 기법을 발견할 수 있다. [[https://youtu.be/yGpjHqlHHTU]|Gruppo Nuova Consonanza Azioni Documentario]] - 엔니오 모리코네가 1960년대에 트럼펫으로 참여한 작곡가들의 모임이며 전위 창작집단인, '새로운 어울림음의 즉흥연주 그룹 (Gruppo Nuova Consonanza Azioni Documentario)'의 다큐멘터리.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로 된 희귀 영상이며 영어 자막이 있다. 엔니오의 연주와 인터뷰를 포함해 그룹의 실험적인 음악은 충분히 들어볼 수 있다. "전위부대"라는 혹은 "선발대"라는 말과 관계가 있는 "[[뱅가드|전위]], 혹은 [[아방가르드]]"는 원래 군사용어로 전투시 최전방에 위치한 선발 부대가 신속하게 진로를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며 돌진해 나가는 행위를 의미한다. 전위 음악은 음악인들이 예술가로서 자신들의 생각과 느낌을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방식으로 마음대로 표현하고 싶은 대로 표현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청중이 음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현재의 음악 시장에서 어떤 반응을 얻을 것인가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는 [[대중음악]]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60년대 당시는 특히 전후 세대의 충격과 공포, [[냉전]]시대 [[핵무기]]에 대한 불안감, 근현대 [[산업화]] 과정에서 인간성의 상실으로 인해 생긴 모호성 및 불확실의 역설과 주체의 붕괴 등을 반영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태동으로 인해 현대음악 작곡가들이 급진적인 실험을 추구하던 시기인 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1960년대 후반 [[북부독일방송]]에 의해 제작된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평소 일반적으로 듣기 편하고 아름다운 영화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로만 대중에 알려진 엔니오 모리코네의 또 다른 일면을 볼 수 있다. 2분 15초부터 트럼펫으로 즉흥 연주를 하는 모리코네와 다른 그룹 멤버들의 모습이 나온다. 언뜻 이상하게 비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자세가 그의 선구적인 영화 음악 사운드 디자인 실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보통 음악인들은 대중성, 음악성, 실험성 등 대부분 한쪽 성향으로 크게 치우치는 경우가 많은데, 대중적인 면과 음악적인 면, 실험적인 면을 차별하지 않고 적극 수용하고 다양한 관심을 보였던 엔니오 모리코네의 광범위한 폭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모리코네는 20세기 이후에도 영화음악보다는 자신이 더 하고 싶어했던 절대음악 양식의 클래식 [[협주곡]]이나 [[오라토리오]], 관현악곡, 실내악 등도 다수 작곡했으며, 대중에 잘 알려진 영화음악의 후광에 가려있던 이들 작품도 최근 들어 다시금 조명을 받고 있다. 다음은 엔니오 모리코네의 초기작들 중 오늘날에도 사랑받는 작품들이다. [[https://youtu.be/0G8JBEHDqUg|Ennio Morricone - The Battle of Algiers]] - [[북아프리카]] [[프랑스령 알제리|알제리]] 국민들이 130년간 통치받던 식민지를 벗어나 나라의 주권회복과 독립을 위해 [[제국주의]] [[식민제국|열강]] 프랑스를 상대로 1954년~1962년까지 8년간 벌인 [[알제리 전쟁]]에 바탕한 1966년 명작 영화, "La Battaglia di Algeri (The Battle of Algiers)"의 테마. 영화의 작품성도 뛰어나 1966년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과 1972년도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영국 영화 아카데미]] (BAFTA) United Nations 상을 수상했다. 전 세계 [[영화 감독]]들이 지금도 이 영화의 드라마틱한 [[리얼리즘]]에 [[https://youtu.be/1KstueVVbgI|찬사]]를 보내고 있고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으로도 출시되었다. (크라이테리온 온라인 채널로도 영자막과 함께 시청 가능). 프랑스에서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건드려 5년간 [[금서|상영 금지]]되었으며, 2003년에 [[미 국방부]]에서 [[이라크 전쟁]] 문제와 관련해 [[중동|아랍권]] 문화에 대해 [[반지성주의|배경지식이 거의 전무하던]] 군 장성들이 [[https://en.wikipedia.org/wiki/The_Battle_of_Algiers#cite_note-Michael_T._Kaufman-32|단체관람]]하며 [[시뮬레이션]]하기도 했다. [[https://youtu.be/m8F2FJpnEU4|Ennio Morricone - La Battaglia di Algeri]] "La Battaglia di Algeri (The Battle of Algiers)"의 메인 테마. 알제리 독립 투쟁 당시의 저항하던 민중들의 처절한 전쟁과도 같았던 시기의 강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https://youtu.be/sY8z00zRgT8|Theme (From "Love Circle", 1969)]] - 1969년 드라마 영화, "[[https://youtu.be/xhAv0JZNZR4|Metti, una sera a cena]] (혹은 "One Night at Dinner" and "Love Circle")"의 메인 테마. 싱커페이션과 전조 등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드라마 등장 인물들의 알송달송한 애정 관계들과 유혹을 표현하고 있다. 지금 들어도 세련되고 감동을 주는 상큼한 멜로디의 보사노바이다. [[https://youtu.be/KkME1Zq3vJM|"CHI MAI" - Ennio Morricone live in Moscow, 2012]] - 1971년 영화, "[[https://youtu.be/Ngdm1FyVJEw|막달레나(Maddelena)]]"의 영화 음악, "Chi Mai (Whoever: 누구든지)." 이후 1981년에는 [[프랑스 영화]] "[[https://youtu.be/e6-NTe1lk-E|Le Professionnel]]"과 같은 해 영국의 인기 TV 드라마, "[[https://youtu.be/WPS4vsm4pxQ|The Life and Times of Lloyd George]]"에 사용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1991년 10월 5일, [[MBC]] [[주말의 명화]]에서 패트릭 알렉산더(1926~2003) 원작 소설 제목인 《어느 연약한 짐승의 죽음 'Death of a Thin-Skinned Animal'》으로(비디오는 영화 원제목으로 출시) 방영한 바 있는데 주인공의 운명을 알 수 있는 제목이다. [[사조대림|대림]] 선[[게맛살|맛살]] [[https://www.youtube.com/watch?v=rKbGdmCEhs0| TV 광고]](씁쓸하게도 일본 광고를 베꼈다...)에도 나온 바 있다. [[https://youtu.be/O96p6ZcO_B4|Ennio Morricone - Come Maddalena]] - 영화 "막달레나"의 메인 테마 "Come Maddalena". 비교적 긴 [[라틴]] [[재즈]] [[드럼]]과 [[교회]] [[오르간]] 인트로로 시작하는 이 곡은, 현악 [[앙상블]], [[소프라노]] 보컬, 여성 합창, [[아날로그]] [[신디사이저]] 소리 등이 어우러진 창의적인 편곡이 일품인 작품이다. 영화는 한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욕망에 번민하는 [[가톨릭]] [[신부(종교)|신부]]를 치명적으로 유혹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https://youtu.be/4mYRO1k_sBk|Ennio Morricone - Amore per amore, pt. 1 - Così Come Sei (1978)]] - 80년대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독일 출신 모델이자 배우, [[나스타샤 킨스키]]가 주연으로 출연하고 이탈리아의 알베르토 라투아다가 감독한 1978년 영화 "[[https://ko.wikipedia.org/wiki/그대_머무는_곳에|그대 머무는 곳에]] (Così Come Sei)"에서 사용된 애틋한 테마, "사랑을 위한 사랑 (Amore per amore), pt. 1. 사랑 없는 건조한 결혼 생활을 하던 한 중년 건축가가 젊고 아름다운 [[대학생]]을 만나 호감을 갖게 되는데, 20년 전에 함께했던 연인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혹시 자신의 친딸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노심초사하다 결국 사랑에 빠지고, 마지막엔 20년 전의 연인처럼 헤어지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